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건축가 조병수 씨의 양평 수곡리 ㅁ자 집 땅속에 박힌 사과 상자 |
이 집이 가장 근사할 때는 장마철이다. 장마철엔 밖으로 난 문은 걸어 잠그고 중정 쪽으로 뚫린 통유리창을 모두 열어놓은 채 연못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마신다. 그렇게 빗소리에 취하다 보면 장마철이 쉬이 가는 게 슬프고도 슬프다. 비가 잠시 울고 간 후 구름 사이로 달이 오르면 너도나도 시인묵객이 된다. |
ㅁ자 안에 가로세로 5m의 구멍이 하늘을 향해, 땅을 향해 뚫려 있는 집. 기둥도 대들보도 없이 텅 비어 있는 집. 그 안에 존재하는 건 땅, 하늘 그리고 빛뿐인 집. 밖은 모두 막혀 있지만 안은 트인 집. 태고의 기억을 담은 바위 네 개가 마당에 누워 있는 집. 뻐꾸기가 놀러 오는 집. 달 맞으러 가는 집. 허어, 달까지 낮은 자리에 떴구나. 이 집 지붕 위에 짚자리 깔고 앉아 달을 보면 앉은 곳이 달인지 지구인지 헷갈린다는데…. 저 달에 취해, 여름밤의 달큼한 냄새에 취해 오늘밤 또 잠을 설치게 생겼다. 저 둥그런 달이나 가져다가 가슴 가득 지어야겠다. 양평군 지제면 수곡리의, 건축가 조병수 씨 집 지붕 위에서 맞는 여름밤이다. 할 말을 하는 것보다,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안 하는 게 더 멋지다는 걸 일깨워주는 그런 집을 짓는 건축가 조병수 씨. 수곡리 언덕배기에 가로세로 13.4m의 정사각형 집을 짓고 여름밤을 즐기는 중이다. 윤기 하나 흐르지 않고 텁텁한 잡곡밥 같은 노출콘크리트 집에서. 밖으로 난 문이나 창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, 네모반듯한 사과상자 같은 집이 이 집이다. 대신 안으로는 가로세로 5m의 중정이 통유리창으로 뚫려 있는 ㅁ자 집. “나무로 만든 사과상자, 그 사각 상자는 투박해도 아름답다. 텅 빈 채로 참 아름답다. 그 텅 빈 공간이 잘 익은 사과로 그득 채워지면 채워진 대로 아름답다. 이런 아름다움은 황금비율 같은 시각적 비례에서 오는 게 아니다. 채워짐에선 넉넉함을, 텅 빔에선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으니 아름다운 거다(‘사과상자에 대한 나의 생각’, 1 2번 사진 속 위치에서 다시 왼쪽으로 90도 정도 몸을 틀면 이 풍경이 나타난다. 집 안엔 ‘수정원’이, 집 밖엔 마당이 있다. 2 밖으로는 막혀 있는 줄 알았는데 소나무 문을 열면 수곡리 논밭이 눈으로 들어온다. 3 초등학교 1학년짜리 조카가 그린 이 집 풍경. 사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그림 속엔 소나무 문, 바위, 꽃무리, 뛰어노는 아이들, ‘뻐꾹’거리며 노래하는 새들이 있다. 2.4m짜리 미닫이 철문을 열면 초록으로 무너지는 듯한 뒷산, 앞뜰의 소나무, 수곡리 논밭이 보인다. 앞마당엔 익산에서 올라온 바위 네 개가 누워 있다. 작은 게 8톤, 큰 게 10톤짜리인데, 그 바위에 누우면 신윤복의 ‘선유도’ 속으로 순간이동한 듯하다. “우리가 걸을 수 있는 징검돌이 있네 / 나무는 바람 따라 흔들리네 / 우리는 신나게 뛰어놀고 / 새들이 지저기네 / 바위는 만지면 울퉁불퉁 / 하고 딱딱하네.(아이가 쓴 글맛을 해치지 않기 위해 원문 그대로 싣는다)’ 조병수 씨의 초등학교 1학년짜리 조카가 이 집 마루에 앉아 쓴 동시 <풍경>이다. 이 집을 두고 이보다 더 아름다운 글은 못 만들어낼 것 같아, 잠시 우두망찰해진다. “이 집의 뻐꾸기가 아주 귀여워요. 처음 집 짓고 들어간 2년 전만 해도 우는 방법을 잘 몰라서 이상한 소리로 울었어요. ‘뻐’ ‘뻐꺽’ ‘꺽’ 하면서. 요즘은 ‘뻐꾹뻐꾹’ 정말 잘 울어요. 주변에 집이 없어서 새들이 많이 놀러 와요. 올빼미도 살았었어요. 밤 10시쯤 되면 올빼미 두 마리가 나무에 앉아 있다가 들짐승을 낚아채는 것도 볼 수 있었어요.” 불필요한 감정이라곤 1mg도 묻어 있지 않은 말로 이 집의 건축을 설명하던 그가, 뻐꾸기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벙긋 웃었다. 보는 이도 함께 웃게 할 만큼. 이 집은 가로세로 길이가 13.4m밖에 안 되고, 그조차도 가로세로 5m의 중정이 가운데 공간을 파먹은 아주 작은 집이다. 방이라곤 1평 남짓한 황토방 하나뿐이고, 다른 공간은 복도이면서 벽이면서 방이다. 이렇게 작은 집은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게 아니다. 먼저 마음이 작아야 한다. 무엇이 더 소중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가릴 수 있는 깨우침이 있어야 이런 작은 집에 살 수 있다. 그렇게 소박한 마음으로 지은 집은 실제론 작지만 그 안은 넉넉하고 편안하다. 문을 열어젖히면 풀과 벌레와 공기가 뒤섞인 여름밤 냄새가 훅 끼쳐 오고, 황혼의 연약한 햇살이 드는 집. 마주 앉으면 발과 무릎이 서로 닿아 찾아온 손님에게 죄송스러운 마음이 드는 집이다. 그래서 더 넉넉한 집. 1 손 씻는 방의 선반은 소나무 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춘양목을 켜서 만들었다. 여기저기서 주워 온 예쁜 강돌, 노출콘크리트 벽에 기대어놓은 박달나무 다듬잇돌이 그림 같다. 2 제주도 옛집의 광 문짝으로 만든 장은 책장으로 쓰고 있다. 아무리 작은 집이라도 지붕의 하중을 지탱하는 대들보와 기둥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흥미롭게도 이 집엔 대들보, 기둥, 방과 방을 나누는 벽이 없다. 대신 5m 간격으로 고재 기둥 열 개가 서 있다. 보나 기둥이 따로 필요 없이 열 개의 나무 기둥이 지붕의 무게를 받쳐준다. 검고 무뚝뚝한 고재 기둥은 가로세로 13.4m의 작은 공간에 띄엄띄엄 세워져 있어 이 끝과 저 끝 사이를 가까우면서도 멀어 보이게 한다. 그 존재만으로 공간에 깊이를 준다. 이 기둥 외에 이 집엔 장식이라곤 없다. 갱지 위에 연필로 찍어놓은 것처럼 분명하되 담백하다. 이 집은 밖으로 난 문으로 내다보는 자연보다 안에서 보는 자연이 더 드라마틱하다. 통유리창으로 된 안쪽의 상자가 그럴듯한 프레임이 된다. “형태가 단순해질수록 그 상자는, 그 집은 자연의 아름다운 형태를 담는 액자가 됩니다.” 건축을 말하면서 그는 다시 말을 아꼈다. 그 안쪽의 상자 가운데에는 연못 같은 수정원(조병수 씨는 물이 채워진 정원을 ‘수정원’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)이 있다. 이 수정원은 지하수를 끌어와 흘려보내고 그 물이 지하로 스며들었다가 다시 돌아오게 한다. “정원 안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사는데 보셨어요? 슈퍼마켓 겸 추어탕 집에서 사다 넣은 놈인데 3년째 잘 살고 있어요. 작년에는 새끼도 쳐서 세 마리가 같이 놀았어요. 올해는 늦봄이 다 돼서야 물을 채워줘서 그 녀석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, 용케 살아 있더라구요. 물 밑으로 진흙 50cm가 깔려 있는데 아무래도 그 속에 숨어 있다가 나온 것 같아요. 허허.” 3 육중한 강철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 현관이 나타난다. 대나무에 햇살을 주기 위해 설계 초기부터 지붕 한쪽을 뚫어놓았다. 4 거푸집에 시멘트를 부어 한 덩어리로 만들어낸 벽난로, 그 앞에 비스듬히 기대어놓은 다듬잇돌, 형광등 두 개를 이어서 벽에 붙인 조명등.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집이다. 집 안 구석구석엔 좋은 나무가 수두룩하다. 1백 살도 더 먹은 고재 기둥은 말할 것도 없다. 이 집의 천장도, 바닥도, 문도, 창문도, 짜 넣은 수납 가구도 모두 소나무로 만들었다. 손 씻는 방의 선반은 소나무 중에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춘양목(경상북도 북부지방과 태백산맥에서 나는 소나무로 대궐이나 사찰의 건축용 목재로 많이 쓰임)이다. 벽에 비스듬히 기대놓는 것만으로도 그림이 되는 다듬잇돌은 박달나무다. 제일 근사한 건 벽에 기대놓은 제주도 옛집의 광 문짝이다. 나무가 단단하고 거칠어서 도끼처럼 생긴 도구로 쳐서 깎아내는데 그 결이 깊숙하고 아늑하다. 작업 테이블 옆에는 역시 이 나무로 만든 예쁜 장이 서 있다. “우리의 옛 장은 대강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순서대로 끼워야 짝이 맞아요.” 저 예쁜 장에서 시집 한 권 꺼내 읽다, 다듬잇돌 베고 눈물 그렁해지는 졸음을 즐기고 싶다. 객이라도 마음을 쉬게 하는 수곡리 집 마당에서, 바위에 걸터앉아 뻐꾸기 소리 들으며 마음을 내려놓는 참이다. 아, 지붕에 올라가 달구경 하며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나 읊고 싶다. “달팽이 뿔 위에서 무얼 그리 다투시나 / 부싯돌 불빛처럼 짧은 시간에 이 몸을 맡긴 처지이면서.” 하지만 그 순간, 조병수 씨가 이 집을 말하면서 선문답처럼 건넨 건축 이야기가 떠올랐다. “나는 빗소리, 흙냄새, 조용히 내려앉는 하늘을 앞에 두고 멍하니 앉아 반쯤 졸기를 좋아합니다. 집을 어떻게 꾸미고, 무엇으로 보이게 할 것인가보다는 그 안에 들어가 어떻게 함께 지낼 수 있을까를 더 고민하고 싶습니다. 상자와 자연 사이, 상자와 사람 사이, 상자와 상자 사이,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진동을 즐기고 싶습니다.” 맑은 산책 후 몰려드는 졸음처럼 어느새 엷은 졸음이 다시 찾아왔다. 5 보나 기둥이나 벽 대신 지붕의 하중을지탱하는 고재 기둥. 6 대들보도, 서까래도, 방도, 방을 나누는 벽도, 그 흔한 침대 하나도 없는 집이다. 문 대신 통유리창으로 수정원과 내부 공간을 가르고 5m 간격으로 점처럼 고재 기둥을 찍어놓았다. 족히 3m는 됨 직한 저 앉은뱅이 테이블이 가끔 침대로 쓰인다. * 이렇게 깊고 그윽한 집을 짓고 때론 주인처럼 때론 객처럼 머무는 건축가 조병수 씨. 건축을 말할 땐 더 말을 아끼고 소중히 하는 그는 집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족하다면서 자신의 등장을 거절했다. 그것도 아주 쑥스럽게. 결국 주인 없는 집을 찾아가 비현실적으로 청명하게 우는 뻐꾸기, 서로를 희롱하는 나비 두 마리와 함께 촬영을 마쳤다. 조병수 씨는 그가 좋아하는 노자의 <도덕경>처럼, 민화처럼, 이름 없는 도공이 거칠게 뽑아낸 흙빛 이조자기처럼 군더더기 없는 집, 형태는 없고 공간만 존재하는 사과상자 같은 집을 짓는 건축가다. 그의 건축설계회사 조병수 건축 연구소(02-537-8261)에서는 그동안 -자 집, ㄱ자 집, ㄷ자 양철지붕집, 세 상자 집, 황인용의 음악실 ‘카메라타’, 이외수 집필실같이 담백하고 아늑한 동굴 같은 집을 설계해왔다. 최근작으로는 사간갤러리, 램프 빌딩이 있다. |
기자/에디터 : 최혜경 / 사진 : 박찬우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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